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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간, 갭이어를 통해 다채로운 색을 채우다.' 1편 -최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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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분위기가 아니라, 매일 안부인사로 마주하는 직원들과 날씨가 좋으면 그냥 나가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 그렇게 그 속에 있다 보니 하루하루 가만히 있으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던 제게 차츰 진정 여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죠.

 

-회색인간, 갭이어를 통해 다채로운 색을 채우다/최현수 갭이어족 갭퍼

 

 

65th 갭이어족 Gapper 최현수
회색인간 갭이어를 통해 다채로운 색을 채우다.



# 사회 알람에 맞춘 대학 졸업장은 당장에 필요한 게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정할 때는 친구들을 따라서, 대학교에 입학 할 때 학과는 부모님의 선택으로. 이름만 최현수로, 정작 본인 최현수의 선택 없이 흐르는 대로 흐르다 보니 어느새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 대학생이 되어있었어요.

정작 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본인 색이 없는 회색인간 같이 말이죠. 그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고 스트레스와 함께 20살, 위궤양과 함께 대학 1년을 끔찍하게 버텨내고 군 입대를 앞둔 시점.

저는 결심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21개월을 온전히 나의 시기로 채워보자, 주체적으로 나라는 사람으로 살아보자.'

그렇게 시작한 나란 사람을 알아가기 위한 첫 단계 ‘메모’ 틈이 날 때 마다,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느낄 때 마다 그러한 순간순간을 기록했고, 느낀 점 등을 쉴 새 없이 적었지요.

이에 그치지 않고 Out put이 있으려면 In put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독서’ 한 권 한 권 읽을 때 마다 인상적인 문구, 느낀 점, 총평을 적는 방법으로 독후감 또한 작성했어요. 그 덕분에 21개월 간 156권이라는 권수가, 3권의 독후감 노트가, 5개의 손 메모장이 채워졌고, 정작 나는 없었던 내 마음 속 저 최현수라는 사람의 고유의 색도 채워지기 시작하는 듯 했어요.

책을 통해 세상을 간접경험 하다 보니 실제로 세상에 나가 책의 배경에도 가보고 싶고 경험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고 군에서 전역 후 계획으로 여행을 준비해요. 그리곤 생애 첫, 군대 내에서 하나부터 끝까지 준비한 약 2달여 간 중국, 유럽 배낭 여행을 다녀온 후 1학년 때와는 달리, 본인의 색을 가진 모습으로 복학을 할 수 있었죠.

2학년 1학기, 군대에서 수기로 작성한 목표 중 하나 ‘장학금 받기’ 그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의로서 학업에 임했고 보기 좋게 학기를 마칠 때는 장학생이 되어 “나도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구나” 라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답니다.

여름방학, 다른 이들은 토익이나 자격증 준비를 할 때 내게 보상을 해주자며 장학금으로 약 3주간 대만 일주를 다녀 옵니다. 그렇게 나로서 잘 채운 후 찾아온 2학기. 1학기는 학점을 채웠으니 2학기는 교내 외 활동과 대외 활동으로 스펙을 쌓자는 생각으로 일정표가 매일매일 꽉꽉 차게 보내는데 당연히 과하게 만든 일정표에 맞춰 생활하다 보니 몸은 몸대로 지쳐가고 자연히 학과 성적 또한 저조 한 결과를 보여주고 말아요.

학업, 대내외 활동 어느 것에도 온전히 집중 할 수 없음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였을까요. 몸이 내가 나로 살지 않으니 화가 났는지 1학년 때처럼 몸이 장염과 위염으로서 신호를 보냈고 다시 제 색을 잃어간다고 생각 할 때, 그 순간 결심합니다.

이렇게 또 다시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 수는 없다, 사회 알람에 맞춘 대학 졸업장은 당장에 필요 한 게 아니다.


"전공공부, 스펙 대신 세상 경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내 공부를 하자 다채롭게 빛을 내는 최현수로 살자."


# 본인 의지만 있다면, 생각보다 큰 비용은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갭이어를 준비하는데 평소와는 달리 더 큰 비용이 필요하다고 생각들을 하죠. 하지만 그런 목돈이 어디서 뿅 하고 나올 리도 없구요. 초등 학생 때 부모님이 네 용돈을 관리하라며 만들어 주신 통장 그 덕이었을까요 그 때부터 백 원 천 원 아껴가며 저축하는 경제 관념이 생겼죠.

학기 중에도 주말 아르바이트를 방학 땐 짧은 시기에 돈을 더 쥐기 위해 공장에서 새벽시간에 일을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생활 속에서 절약하고 아끼는 습관이 군대에서까지 이어져 그 적다는 군대 월급도 조금씩 모았구요. 

그러나, 그렇게 모았던 돈도 몇 차례의 여행을 거치고 나니 거의 바닥을 보이더군요 결국 부모님께 부탁을, 아니 부모님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휴학 후 돌아오면 2학년 때처럼 장학금을 받을 것이고, 내 손으로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겠습니다. 한 학기 등록금 만큼만 빌려 주세요."

 

그러곤 그 돈을 흥청망청 썼을까요? 결국 부모님한테 받았네 이런 이야기 될까요?

이 것은 돈이 아니라 부모님의 노후이다, 최대한 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발 전, 도서관에서 캐나다 관련 책들을, 심지어는 컨설팅을 가보기도 하고, 당연히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캐나다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좀 더 나가 일할 때 갖춰야 할 자격증, 조건 등을 조사했어요.

그 덕이었을까요, 도착하자마자 영업장에서 사용 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해 일주일 만에 숙식이 제공되는 호텔에 일을 잡을 수 있었어요.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생각보다 큰 비용은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 대비는 꼭 해야겠지만, 굳이 잔고에 목매며 갭이어를 늦추는 일을 하는 것 보다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집중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는데 너무 연연하지 말걸 하는 생각도 해봐요.

그리고! 부모님께 받은 돈은 고스란히 잔고에 있답니다.

 


# 한 번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죠.




사실 휴학 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고되고 힘든 결정이었답니다. 저를 지지해주던 학과 교수님과의 면담 중 “외화 낭비의 일등공신이 될 것이고, 전공도 영어도 얻지 못할 것” 이라며 혹평을 듣기도 하니까요.

비단, 이것들 뿐이었을까요? 졸업을 앞두고 필드로 나갈 동기 여자학우들과 자격증 준비에 한창인 남자 동기들, 이후 상위 자격증에서 경력이 뒤쳐질 것이라는 선배들의 말, 친척이나 지인들의 시선, 사회적 알람, 한 번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죠.

떠나기 전에는 시간과 가치를 잴 수 밖에 없더라구요 '남들에 비해 뒤쳐지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과 말이죠.

그런데, 작년의 불안이나 걱정거리가 생각 나시나요? 아니 그럼 지난 주의 걱정거리나 불안이 생각 나시나요? 걱정이나 불안은 지나면 생각도 나지 않을 거라고 마주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혼자 몰래 가도 될 일을 두려워서 였을까요 어릴 적 혼자 집에 있을 때 TV를 켜놓았던 것 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고, 교수님에게 면담을 요청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나 이거 할거야!"

라고 말하며 다닌 게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고 생각해요. 이 덕에 하나 확실하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있어요. 

'무언가 하고 싶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라' 생각보다 언어의 힘은 강하더라구요.

그 힘이, 걱정을 나누는 것이, 마주하는 것이 어느새 머리 속에서 두려움을 생각하지도 못 하게 해줄 것이니까요.



# 마음가짐이 바뀌니 긍정적 선순환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는 지난 캐나다.



거슬러보면 제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하게 된 것은 '군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라고 말하곤 해요. 

조금 더 나 답게 살아보려고 시도했던 21개월 덕에 여행 관련 서적들을 읽었던 게 시발점이 되어 전역 후 다녀온 외국여행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느낀 세상 경험의 필요성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왔고 그렇게 마주한 캐나다는 제게 기회였고 여유였으며 오아시스였어요.

도착 직후 구직을 준비하며 자격요건을 취득하고 밤새 준비한 인터뷰, 그 덕에 트립어드바이저 1위 호텔에서 바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을 시작 할 수 있음에 모국어가 아닌 곳에서도 내가 살아 남을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고

한국에서는 반 오십이라며, 군대 다녀 온 아저씨취급을 받는데, 이곳에서 24살이라면 Baby, Super Young 하다며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어요.

지역 프로그램으로 있는 다양한 수업들도 듣고 액티비티도 다 참여했어요. 영어 수업은 물론 요리수업, 생소한 Zumba, 숨겨진 트레일 코스를 달리거나 세계적 호수에서 스케이팅을 하는 등의 모임 등에 참여하기도 하고 말이죠.

엄격한 분위기가 아니라, 매일 안부인사로 마주하는 직원들과 날씨가 좋으면 그냥 나가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 그렇게 그 속에 있다 보니 하루하루 가만히 있으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던 제게 차츰 진정 여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짧지만 길었던 벤프에서의 6개월을 보내고 나니 추천서도 받고 세계적 체인의 호텔에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펙을 쌓으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왔다는 생각으로 약 2달여간의 미 서부 로드트립을 떠났습니다.

쉼표 속에서 쉼표를 또 갖게 되니 무엇인가를 경험할 때 받아드리는 마음이, 시선이 더 깊게 빨아드리는 것 같았달까요. 그렇게 캐나다 서부까지 올라와 학교로, 집으로 돌아간 직장의 친구들도 만나고 캐나다 시작점 벤쿠버와 빅토리아에 들르니 가지고 있던 걱정은 온데간데 없이 좋은 기억들만 보이더라구요.

지금 이 과정에서도 모를거에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펼쳐 질 지, 하지만 그 결과가 좋으면 그렇게 헤매고 불안하던 시기도 밝게 보이겠죠.

6개월의 일을 하고 2달의 여행을 마치고 나니 제 비자는 얼마 남지 않아 구직하기에 힘들 거라는 주위의 우려들이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어요, 제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보기 좋게 이전에 일을 했던 장소인 벤프로 돌아온 당일, 일을 잡을 수 있었어요.

마음 가짐이 바뀌니 긍정적 선순환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는 지난 캐나다에서의 시간이었어요.
앞으로 남은 시간도 긍정적으로 그려지구요.

# 전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더라도, 두드리면 될지도 모르는구나




오자마자 자력으로 일을 구할 수 있었던 것, 벤프지역 신문에 제 사진이 실린 것, 캐나다에서 찍은 사진이 코엑스 전시에 걸린 것, 워킹홀리데이 자료로 한국 공모전에 당선 된 것, 풀코스 마라톤을 달린 것, 외교부 워킹홀리데이 통신원이 된 것, 친구들과 여행을 다녔던 것, 하루하루 즐겁게 채우던 것 이렇게 나열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요. 

그만큼 행복했던 기억들이 많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진한 인상이 남아있는 일이 있어요.

미 서부 로드트립 중의 일이었어요.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숙소 예약도 없이 해안가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었어요. 해안가 도로를 구경하며 가다가 멈추고 싶은 곳에서 내려 노래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는 저물기 시작해 하늘은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죠.

다음 도시까지는 꽤나 먼 거리가 남았고, 동선에 있던 모든 캠핑장이 자리가 없어서 자는 건 마다하고 당장 저녁을 해 먹을 장소도 찾을 수가 없던 곤란한 때, 저녁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캠핑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깜깜한 밤, 캠핑을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 조차 폐가 되는 것 같았지만 구석에서 취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묻기를 수 차례, 다들 본인들의 시간과 공간을 침해하는 게 싫어서 였을까요 아무도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지 않아 거진 포기를 할 때쯤 

한 커플이 흔쾌히 자리는 물론, 심지어는 불을 함께 써도 된다고 해주는 거에요!

그렇게 급하게 저녁을 해서 그 커플에게 나누어주고 더 이야기를 진행하니 본인들은 캠핑카에서 잘 예정이니 너희가 우리 자리에 텐트를 치고 자라고 하는 것 있죠.

누군가의 호의 덕에 참 운이 좋았던 일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저는 크게 얻어 맞은 것만 같았죠.

"전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더라도, 두드리면 될지도 모르는구나"

앞으로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게 된 것만 같아 개인적으로 참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실제로도 기대하지 못 한 곳에서 좋은 일이 발생해 정말 즐겁게 보내기도 했었구요.


#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며 서러워했던 밤 들도 없었다고는 말 못하죠.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한인과의 관계일 거에요.
저는 상대적으로 한국인이 적은 관광도시에서 워홀을 했어요. 설날 전에 일을 잡았기에 비싸지만 겸사겸사 한식당에 가서 밥을 먹자 하고 갔는데

그 곳서는 다른 레스토랑과 다르게 저를 테이블로 안내해주는 것도 없었고 계속 기다리다 메뉴판을 달라고 하니 “예약 하지 않았으면 못 먹는다”라며 문전박대로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 한 채 식사도 못 하고 나왔어요.

캐나다에서 그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 한 대우를 한국인에게 받고 난 후 내가 캐나다 문화를 접하러 와서 한국을 찾아서 겪게 된 일이구나 이것이 워홀러에게 한인 사회의 현실이구나 깨닫는 일이기도 했어요.



#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며 서러워했던 밤 들도 없었다고는 말 못하죠.



하나 힘들었지만 기억 남는 이야기를 뽑자면 호텔에서 주방 보조로 일할 때의 이야기에요. 메인 레스토랑들의 주방이 아니라 호텔직원 전용 식당의 주방에서 가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었어요. 

마약 중독에 다혈질이고 감정 기복이 커서 다른 주방 직원들도 꺼려하던 직원식당 담당 셰프는 그곳에서 일 할 때 마다 제 일을 간섭은 기본, 처음에 영어로 도구나 재료들 이름을 몰라 할 때는 일부로 더 빠르게 영어로 말하며 “너 못 알아 들었지?” 하며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게 면박을 주기도 하고 매니저에게 지시 받은 일을 그렇게 하지마라며 더 복잡하게 만들기 일쑤였지요.  

그러곤 어느 날 직원식당에 고정 시프트로 일하는 주방 보조 동료가 일을 그만 두게 되고 그 공석에 제가 들어가게 되었어요. 정말 끔찍했죠 그렇게 일하는 환경도 분위기도 불편하게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대학 시절 때 위궤양 증상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일을 마치고 숙소에 가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차기도 혹여 걱정을 할까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는 혼자 끙끙 앓며 말도 못하고 서러움으로 수 밤을 채웠었죠. 

주방보조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실을 아는 부서 매니저가 그 셰프를 징계까지 받게 했지만 소용 없었어요. 그리곤 생각이 바뀌었죠, 극복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문제로 여기던 그를 친구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캐나다에 와서도 한국식 일처리에 머물러서 왜 내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지? 싶었거든요 하나의 풀어야 할 성장 과제라고 여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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