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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교육을 결합시킨 에듀바이클러 -오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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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st Gapper 오영열

갭이어 기간 : 2015~ 현재 진행 중

란도너스 자전거 대회 참가를 시작으로 현재는 자전거로 교육을 하는 약속의 자전거 대표.

 

 

 

 

 

 

 

 

 







#1.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다.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저는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치는 학생이였습니다. 학교선생님은 분명 배움은 곧 즐거움이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떠한 부분이 그러했는지 의문스러웠습니다. 당연히 꿈은 없었고 부모님이 그저 ‘대학교만 가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수능에다 재수까지 한번하고 드디어 대학교를 입학했습니다. 
대학교를 진학하는 과정에서도 제가 원하는 과를 가기보다는 학원선생님이 성적에 맞춰준 대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렇게 첫발을 내딛은 대학교는 그야말로 사막한가운데에 내던져진 것 같았습니다. 

요점만을 찝어 주는 학원교육을 벗어나서 스스로 공부를 하려다 보니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몰랐고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는 공부에 대한 흥미를 더욱이 떨어트렸지요. 분명 대학교에 오면은 원하는 모든것들을 다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애초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방황을 하던 저는 때가 되어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저는 의무경찰로서 근무를 했는데 그때 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강남지역일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번화가지만 실속은 성매매 업소가 많이 성행하는 지역이였지요. 바닥에 굴러다니는 성인물 전단지는 정말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고 걸을 때마다 발에 치일 정도로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근처에는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고가 정말 많았다는 것이였지요.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뿌려진 전단지를 보며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저는 지역일대의 성매매 업소를 단속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군인의 신분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노력한 결과 저는 의무경찰 최다 검거율을 달성하게 됩니다.




오토바이를 들이받거나 몸싸움등 몸을 사리지 않는 검거활동을 통해 무엇이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한 사람의 노력이 다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들더라구요.(지속적으로 체포활동을 벌이니까 어느 순간 모든대원들이 현행범검거에 자발적으로 나서더라구요) 






#2. 자신과의 싸움의 시작

자신감이 한창 차오른 그 시기에 저는 휴가때 자전거 국토종주를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정말 운동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자전거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즐거움과 자신만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묘한 매력이 저를 끌어당겼지요. 

첫 국토종주를 어떻게 준비해야 될지 몰라서 무작정 집에 있는 자전거와 달랑 가방 하나 매고 자전거도로를 따라 국토종주를 떠났습니다. 먼거리를 자전거하나에 의지하여 달리는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새벽에 잘곳을 찾지 못하여 벌벌 떨기도 했고 산을 오를때는 땀을 뻘뻘 흘렸지만 고생을 하며 경상도까지 달리니 ‘이런게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장거리라이딩은 멋진풍경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독히 안장위에 앉아서 ‘스스로’와의 싸움을 해야하기도 했습니다. 

군 제대후 휴학을 하고 직접 자전거동아리를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꾸준히 자전거를 타며 전국을 달렸습니다. 계속 타던 찰나에 작년4월에 세월호 추모라이딩인 ‘금요일의 마중’프로젝트를 해보자고 제의가 오더라구요.  헬멧에 노란리본을 메고 서울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약 400km를 자전거로만 달리는 프로젝트였는데 세월호 사건을 자전거인의 방식으로 기억하자는 취지가 너무 좋아서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200km가 넘는 장거리였고 많은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새벽의 추운날씨 속에 저체온증에 시달렸고 벌벌떨면서 페달을 밟은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덤프트럭이 많이 다니는 도로 한 가운데서 펑크가 나 위험을 무릅쓰고 수리를 하기도 했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려서 쓰레기 봉지로 몸을 덮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한 팽목항은 노란깃발들을 펄럭이며 우리를 맞이해주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었는데 첫째는 이번 라이딩이 자전거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것. 많은 라이더분들이 다음에 같이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쳐 주셨고 두번째로는 장거리 라이딩에 대한 자신감이였습니다. 취지와 동시에 긴 장거리를 홀로 안장위에서 견디며 자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해야되거든요. 그것을 조금씩 이겨내 보니 점점 큰 장거리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에 우연히 세계 최고의 자전거 장거리 레이스인 ‘란도너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란도너스는 200km에서 1200km 사이, 혹은 그 이상의 장거리를 외부 도움 없이 순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달리는 사이클을 뜻하며 특히 경쟁시합이 아니라는 대회소개글이 너무 좋았습니다. 란도너스는 제한시간내에만 들어오면은 누구나 완주증을 주거든요. 

란도너스는 란도너가 등록된 어느국가에서도 라이딩이 가능하며 한국 또한 2010년도부터 이 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큰맘먹고 대회를 신청하고 하루하루 연습에 매진을 했지요. 그리고 저의 첫 대회인 서울 400km가 시작되었습니다.
 


 


#3. 세계 최고의 장거리레이스 '란도너스'를 향해 달리다

란도너스는 세계최고의 자전거장거리레이스 대회라서 정말 준비해야할 것들이 많은데요. 험준한 코스와 장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는 조금 빠른 자전거가 필요했고 이에 못지 않은 실력도 겸비해야 했습니다. 

저는 제대 후 바로 휴학을 하고 은행에서 보안요원으로 5개월가량 근무했습니다. 한달월급은 약 100만원정도 되었고 모은돈으로 입문용 사이클자전거를 구매하였고 규정(전조등1개, 후미등2개, 야광조끼, 발목밴드, 보험증명서)에 명시되어있는 물품을 구매하였습니다. 

전조등은 비싸더라도 밝기가 쎈 것을 구매해야 야간라이딩시에도 안전하며 후미등의 경우 사람이 있다는 표시만 하면 되는것이기에 가격이 싸도 무방합니다. 야광조끼나 발목밴드는 아무거나 사셔도 괜찮습니다. 또한 자전거져지, 헬멧, 자전거전용신발, 스포츠용 물통, 휴대용 펌프 그리고 펑크시 수리할 공구와 튜브도 여분으로 챙겨야 장거리라이딩에 도움이 될 겁니다. 여행을 목적으로 가는분들은 가방을 메고 가셔도 되지만 저와같이 장거리대회에 도전하는 분들은 가방을 메기보다는 자전거에 부착할 수 있는 휴대용가방을 가지고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음으로는 장거리에 맞는 체력을 길러야 할텐데요. 란도너스는 최소200km에서 최대1200km까지의 코스가 있습니다. 각 구간마다 제한시간이 있구요. 험준한 산악지대는 필수로 포함되어있습니다. 코스가 길면 길수록 산악지대도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됩니다. 


 저는 주1회씩 하루에 100km를 달리며 장거리 라이딩을 연습하였고 평상시에도 코어운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코어운동의 경우 자전거여행은 힘들면 쉬거나 천천히 달리면 되지만 장거리대회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며 쉬지도 못하기에 몸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또한 산악코스를 연습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북악산을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치만 이보다도 중요한 것은 평소에 자전거가 생활화 되어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합니다.



 
위 사진이 당시 코스이고 빨간 풍선모양은 체크포인트라고 해서 지정된 구간마다 도장을 찍은뒤에 완주지점에서 확인을 받아야 완주가 인정됩니다. 저는 출발지에서 간단한 절차를 거친뒤에 대회시작과 함께 힘차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반100km정도는 그 동안 연습량이 있었던 터라 나름 수월하게 달렸습니다. 페이스가 비슷한 라이더분들과 함께 그룹을 이루어 달리니 한결 앞으로 나아가기가 수월하더라구요. 

그렇게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을까요.. 100km를 돌파하고 200km를 달리는 중 날씨가 무척 더워졌습니다. 체질이 더위를 잘타는 편이라 금방 호흡이 가파지고 체력 또한 조금씩 저하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수분을 섭취하고 페이스조절을 하며 달려도 힘이 들더라구요. 심지어 달리면서 토를 했을 정도 입니다. 

그렇게 200km를 초과할때쯤 이 대회의 가장 난코스인 산악지대코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몸과 정신이 많이 지쳐있던터라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지만 포기하기 싫어서 계속 달렸는데 고개를 하나씩 넘을때마다 힘들어하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결국 저는 4번째 고개를 넘는 도중 대회를 포기하기 위해 자리에 멈추어 섰습니다. 

산중의 허름한 건물에 몸을 기대어 끊임없이 자책을 하며 대회스태프에게 전화를 걸어 포기를 알리려는 찰나에 문득 저의 소중한 사람의 번호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왜 그때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저는 정말 엄청 울기 시작했습니다. 

힘들때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줄 누가 알았겠나요. 제가 계속 우니까 상대가 계속 저를 다독여 주며 괜찮다고 응원을 해줍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러한 말도 했어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생각하면 포기해도 괜찮아. 그리고 만약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달렸다면 나는 실망할꺼야. 무엇을 위해서 달리려 하는지 생각해봐.”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하며 이 대회를 왜 달리려 했는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아 보았습니다. 저는 남에게 잘보이려고 달리려는게 아니였어요. 제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서 그리고 자전거와 소중한 추억을 쌓기 위해 달리는 거였어요. 제가 최선을 다했을까요? 저의 두 다리는 서있었습니다. 아직 힘이 남아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왠지 모를 에너지가 몸에서 솟구침을 느꼈습니다. 저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어요. ‘하면 또 할 수 있겠다’라는 힘찬 생각과 함께 저는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리가 아파왔지만 전과는 달리 웃는얼굴로 페달을 밟을 수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무사히 산악지대를 통과하고 23시간동안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더니 마침내 완주지점에 도착했더랍니다.




이 대회를 나오시는분들은 정말 고가의 자전거에다가 좋은장비들을 갖추고 계세요. 저는 그분들에 미치지 못할정도로 저가의 제품들이였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달리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 같아요. 대회가 끝나고 저는 3일정도를 누워만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 대회가 정말 좋은대회기는 하지만 두번 다시 하고싶지 않은 대회이기도 했어요. 저는 ‘다시는 참가 안한다’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3주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어느새 ‘란도너스 서울600km’출발선에 서있더라구요. 
 




#4.제한시간 40시간 중 39시간 39분만에 골인지점에 도착하다

 
서울400km때는 평지구간도 정말많았었는데 위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울600km는 강원도로만 코스가 이루어져 있는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산만타는 아주 극악의 코스입니다. 실제로 란도너스 협회에서도 현존하는 코스중 가장 어려운 코스로 손꼽았어요. 그치만 굴러가는 바퀴는 멈추지 않기에 저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힘들었다는 이야기만 쓰다보니 민망하지만 이 대회는 제 생에 가장 힘들었던 대회였습니다. 강원도는 차로도 가기 힘든곳이라 하는데 자전거로 돌파하려하니 쉽지가 않았어요. 


일반적인 자전거 여행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보이죠? 이때는 제한시간이 40시간였는데 시간이 지체되서 쪽잠2시간만을 자고 계속 달렸어야 했답니다. 전 대회와 동일하게 아픈 증상들이 나타났지만 추가로 나타난 무릎통증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어요. 파스를 뿌리고 냉찜질을 하며 조금씩 통증을 완화시켰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임시처방이였어요. 한번은 약1000m 높이의 돌산령이라는 고개를 지날때였는데 이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았어요. 대회코스 중에 제일 높았고 가장 급경사이기도 했지요.




정상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아서 바닥에 누워버리고 말았답니다. 아직 갈 길이 400km나 남았었지만 이후에는 쉬운 코스밖에 없다는 대회스태프의 말을 들으며 신나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어요. 물론 그 말이 거짓이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여튼 계속 달리다가 강원도 속초쯤 도착했을 때 체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기 위해 여관에서 2시간정도 꿀잠을 잤습니다. 일어나서 출발하려고 하니 아주 몸이 천근만근이더라구요. 계속해서 달리며 어느덧 마지막 체크포인트인 강원도 횡성에 도착을 했답니다.

피부는 타서 빨갛게 그을렸고 피로에 쌓여 바람을 계속 맞은 눈의 핏줄은 다 터졌더라구요. 한여름에 대회가 벌어진 터라 정말 물을 엄청 먹었습니다. 남은구간이 100km정도 남았었는데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쉴 겨를이 없더라구요. 그때부터는 영화의 한장면처럼 “내 온몸의 세포들아! 조금만 힘을다오!”라고 계속 외치며 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한시간 40시간 중 저는39시간 39분만에 골인지점에 도착했답니다.(사실 10분전에 도착했었는데 골인지점이 기존과 달라져서 찾느라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대회에 나가기전 많은 사람들이 ‘그 자전거로는 완주가 어렵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저는 당당히 해냈답니다. 

그동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라’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오며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몰랐지만 대회가 끝나고 나서야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저는 이 이후에도 계속 도전을 해나아갔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동호인 라이더들이 기부라이딩을 펼치는’ 행복기부나눔라이딩530km’에도 참여를 했었구요. 란도너스 같은경우에도 꾸준히 지속해 나아가고 있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 친구인 자전거와 함께 도전을 계속해 나아갈 것이에요. 그것이 저에게도 도움이되지만 다른이에게도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제 심장이 식지 멈추지 않는한 페달은 계속해서 굴러갈 것입니다.






#5. 물론 슬럼프는 있었다.

저는 학교를 휴학하고 자전거만을 타고 다닐 때 주변 또래 친구들은 취업준비, 스펙쌓기 라던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더라구요. 그동안 사회에서 걸으라고 했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남들과 다른길을 가려니까 두려웠습니다. 이러다 남들보다 뒤쳐지진 않을까, 사회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까등의 생각이 들더라구요. 실제로 슬럼프도 길게 찾아 왔었구요. 

그치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더 열심히 해야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내가 너보다 토익점수가 높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너 보다 자전거를 잘 탄다”라고 말하면 그 뿐이지요. 두려움속에서도 계속 자전거로 도전을 하며 글을 올리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주시더라구요.  

저의 이야기를 듣고싶다는 사람들도 생기고 심지어 자전거 관련회사에서도 취업제의가 있었습니다. 계속 하고싶은 것을 하다 보면은 길은 열리기 마련이에요. 절대 두려워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세요. 






#6.  자전거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행복한 기억
 
우리나라 최고의 동호인 싸이클선수이신 이형모선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형모선수는 자전거인이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인데요. 12일동안 5000km를 달리는 ‘자전거 미국횡단레이스 RAAM’을 아시아에서 2번째로 완주하신 분입니다. 저는 이분을 정말 존경하고 닮고 싶은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왼쪽이 이형모 선수. 행복기부나눔라이딩을 주최하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란도너스에 나가기전 우연히 이형모선수와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형모선수에게 제가 가지고 있는 자전거에 대한 신념과 앞으로도 도전을 해나가아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자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가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옷장을 뒤적이시더니 자신이 예전에 입었던 유니폼을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최고의 선수에게 저 같은 사람이 유니폼을 받다니요… 한사코 거절을 했지만 꼭 너가 입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며 유니폼외에도 새양말이라던가 기타용품들을 엄청 주셨습니다. 닮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전거인생에 있어서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7. 갭이어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

제 자신의 삶에 ‘나’가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듯 합니다. 갭이어 이전에는 저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해본적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 사회의 기본 틀은 학교를 단계적으로 올라가고 대학졸업 후 스펙을 쌓고 취업을 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죠. 이 구조속에서는 높은점수와 멋진간판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면 되지만 ‘나’를 되돌아 보는 시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치만 갭이어를 시작한 이후로 조금씩 ‘나’라는 존재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나는 무엇을 해보고 싶은걸까?’ ‘행복하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삶의 준비를 해야할까?’라는 고민부터 이제는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까지 나아갔으니 정말 많이 성장했지요. 예전에는 흰 종이에 ‘나는 누구인가?’를 적으라고 하면 어떻게 적어야 할지 막막했지만 이제는 막히지 않고 열심히 적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를 찾은 것이 갭이어 전후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오영열님의 갭이어 스토리 이어서 계속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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