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상세한 팁과 정보를 확인해보세요.
|
40th gapper 박주홍
1년 반 동안의 갭이어
갭이어 기간 동안의 경험 : NGO단체에서의 인턴
# 짙은 안개 속을 거닐던 나의 20살, 나에게 필요했던 브레이크
"내 대학생활의 현실은 뭍사람들의 기대는 둘째치고 내 기대와도 전혀 달랐다."
20살의 저는, 그냥 그렇듯 입시를 막 끝내고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입학한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생각해보면 19살과 20살의 차이를 아직 알지 못한 미숙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의 대학생활은 ‘보통’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잘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냥 ‘보통 이하’였던 거죠.
저는 원래 어디서든 나서길 좋아하고 주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는 나름 기대 요망한 학생이었어요. 그런 타이틀이 만족스러웠죠.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존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제 대학생활의 현실은 뭍사람들의 기대는 둘째치고 내 기대와도 전혀 달랐어요.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면서 재미있을 것 같은 학과에 점수에 맞춰 입학했는데 아무래도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 된 것 같네요. 생각보다 따라가기 힘들었던 영어 수업 때문에(학과 특성상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수업시간마다 교수님 눈치를 보며 ‘과연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고 싶은 거지?, 나는 이 과에 왜 왔지?’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런 마음의 방황은 제 삶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시골 소녀가 느낀 도시에서의 소외감, 살기 어리고 숨막히던 교실, 바닥을 치는 내 자신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진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내 인생. 이 모든 것이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걱정이라고 해도 어리기 때문에 느껴지는 무게감도 컸어요.
그래서 1학년을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휴학을 했습니다. 그냥 내 인생을 흘려 보내고 싶지 않았고 막연히 인생의 실마리를 찾고 싶었어요. 짙은 안개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필요한 건 브레이크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런 계획은 없었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대학생활은 잠시 잊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경제적 독립을 위해 시작한 '일'
"그렇게,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곳에서도 쉽게 ‘열심’을 바칠 수 있는, 그렇게 쉽게 조바심을 내고 갈피를 못 잡았던, 그런 나이였다."
휴학하고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아르바이트였습니다. 백수 신분까지도 부모님께 손 벌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며 스스로를 채찍질 했어요. 안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20살이 되면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기 때문에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많이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20대 초반의 여자가 사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부분 서비스 업종이었어요. 그래서 대부분 했던 일이 백화점, 일식집, 과외, 패밀리 레스토랑, 호텔, 학원 등이었는데 가리지는 않았습니다. 제 코가 석잔데 가릴 것이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이 중에서 제일 배울 게 많았던 일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어요. 업무에 대한 시스템이 잘 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직원 교육도 체계적이었고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당시 패밀리 레스토랑만큼 최저임금보다 후하게 시급을 더 잘 쳐주는 곳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더없이 안정적이고 성장을 도와주는 일자리였고 그곳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슬슬 패밀리 레스토랑 특유의 음식냄새가 정겹기 시작할 때였어요. 원하는 독립을 손에 얻었더니 목표가 사라진 게 문제였는지 저는 또 습관처럼 ‘생각’이란 걸 하게 된 거에요. 돌이켜 보면 놀지도 않고 일에만 몰두했었죠. 그렇게 제 20대 초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곳에서도 쉽게 ‘열심’을 바칠 수 있는, 그렇게 쉽게 조바심을 내고 갈피를 못 잡았던, 그런 나이였던 것 같아요.
#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 필리핀 NGO
"그래서 이번에도 또 흔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아는 분께서 필리핀 NGO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큰 고민이 없이 쉽게 수락해 버렸죠.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작은 도시에서 자라 서울로 상경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저에게 ‘큰 물’ ‘해외문물’에 대한 관심이 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NGO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또 흔들리기로 마음먹었죠.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무게 앞에 또 탈출구를 찾아 떠났습니다.
이번 한번만 더 현실에서 도망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 한 켠에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그렇게 필리핀으로 출발했고 도착하자마자 마닐라에 있는 현장 방문을 했어요. 비가 세차게 내린 다음 날이어서 그런지 곳곳에서 빨래와 목욕을 하고 있었어요. 빨래 비누 냄새가 짙게 풍겨졌죠. 길 양 옆으로 빼곡한 집들(나무나 판자로 얼기 설기 데어 놓은 곳이라 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사이에서 주민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어요. 뭔가 복잡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여기에서 제가 한 일은 크게 현장 근무와 오피스 업무였어요. 소개 받은 곳은 국제 구호활동은 하는 현지 NGO단체이었는데 한국인 후원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한국인이 필요했서 제가 가게 된 거죠. 그래서 평일에는 사무실에서 후원자 관리, 홍보 마케팅, 사업 기획, 사업 모니터링 및 관리를 하고 금, 토요일에는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사업 모니터링 등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작은 NGO였기 때문에 온갖 잡일부터 사업 기획 등 큰 일까지 경험해 볼 수 있었어요.그리고 현장 조사를 위해 필리핀 오지나 해외를 가야 할 일이 더러 있었고 다양한 배경의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기 때문에 문화나 관습에도 빨리 익숙해져야 했어요. 열심히 일하길 좋아하는 저에게는 더없이 재미있고 신나는 하루하루였습니다.
# 필리핀에서의 갭이어, 그리고 확실해진 나의 꿈
"그 때의 방황과 인생에 대한 절실함들은 다양한 경험 끝에 이른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 ‘나에 대한 회복’으로 변해갔다."
누군가 필리핀에서 언제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다면 수많은 영상이 머리에 펼쳐져요.
산골마을 아이들의 2시간짜리 하교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 먹은 야자수의 맛,
배타고 버스 타고 오토바이까지 타고 구비구비 찾아간 오지 마을,
현지인 친구들과 싸구려 불꽃을 가지고 놀다가 불꽃은 커녕 연기만 자욱해져 함께 낄낄거렸던 파티,
현지 시장에서 처음으로 돼지 눈깔 한 더미를 보고 한동안 돼지 고기를 못 먹었던 기억,
홍수로 잠겨버린 사무실 겸 숙소를 대청소 하면서 사방 가득 맡았던 물 냄새,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던 그 조용한 밤,
일하다 말고 현지 직원들과 훌쩍 떠났던 소풍...
한꺼번에 쏟아 낼 수 없을 정도로 다사다난했고 그 안에는 각각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어요. 다만 그 추억의 끝에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제 방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하늘의 모습이 아련하게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아침 저녁마다 신께 기도를 했어요. 보다 낭만적인 표현을 위해 신이라 표현했지만 저는 기독교 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거예요. 제 인생의 비밀을 찾기 위한 우주와의 대화라는 표현을 하고 싶지만(웃음) 이렇게 거창한 건 아니었어요. 아침저녁으로 필리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소소하지만 다양한 삶의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을 읊조리곤 했죠. 그 때의 방황과 인생에 대한 절실함들은 다양한 경험 끝에 이른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 ‘나에 대한 회복’으로 변해간 것 같아요.
사실 필리핀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정말 일만 열심히 했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령도 없이 일했습니다. 일이 재미있었고 일 자체에도 큰 의미가 있었으니 불만도 없었어요. 기관 내에서 안 해본 업무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 지속적인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러한 수많은 경험과 나를 돌아보는 시간들을 통해 저는 진짜 ‘나’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제 삶의 기준 같은 것들이 생겨났죠.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제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혹은 발전 지향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러한 기준들은 뚜렷하고 분명하게 ‘무엇이 되어야한다’라고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었죠. 그렇게 삶의 방향이 확실해 지고 나를 받아들이고 나니, 그동안 휘몰아쳤던 내 마음 속의 바람들이 잠잠해진 거 있죠.
# 갭이어 그 후, 현실은 변함없었지만 '나'는 변하였다
"학기가 지날수록 다른 의미로 괜찮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복학을 결정하고 NGO 활동을 마무리 했어요. 아무 것도 뚜렷한 게 없었고 여전히 저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자신이 생겼다는 사실이에요. 무엇을 향해 가야 할지를 ‘결정’하고 나니 그 어려운 수업도, 달라진 환경도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어요. 앞으로 닥칠 일들이 오히려 기대가 되었죠.
물론 갭이어를 보내고 저에게 펼처진 길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어요. 우리네 삶이 늘 그렇듯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이잖아요(웃음). 여느 복학생처럼 저도 3년 만에 돌아온 학교생활이 정말 낯설었어요. 심지어 휴학 중에 학과 건물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뀌어서 교실도 제대로 못 찾기도 하고, 동기들도 없는데 고학번이라는 이유로 달게 되는 감투들에 여전히 어려운 수업들이 저를 짓눌렀죠.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이제는 제 스스로 더 열정적인 학생이 되었어요. 열심히 할 이유가 있었고 이 모든 것들이 즐거웠기 때문이죠. 학기가 지날수록 다른 의미로 괜찮은 대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 나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창업
"갭이어의 휴지(休止)가 오히려 나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주었다."
저는 현재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창업을 하였습니다. 사회 혁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처음부터 사회적 경제라는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해외 NGO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에 학교를 다니면서 교내외의 다양한 국내외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이렇게 쌓은 경험 덕분에 이렇다할 자격증도 없이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취직을 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일을 하면서 사회적 경제에 대한 개념을 알게 되었고 제가 원하는 사회 변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싶어 창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이야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갭이어 경험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표현을 감히 쓰고 싶네요. 갭이어 기간 동안 그렸던 제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갭이어는 어쩌면 나에게 도피처였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갭이어의 휴지(休止)가 오히려 나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제 20대 초반의 경험이 20대 중반의 사회적 환경을 결정했고 30대의 시작까지 영향을 끼쳤어요. 따라서 미래는 몰라도 갭이어 기간 동안 느꼈던 경험과 감정이 현재까지의 제 인생을 결정했다고 속단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자신 있게 ‘나’를 찾으러 현실을 벗어나 보는 것은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해요. 모두 나와 같은 방법이 인생의 답이 아니겠지만 한번쯤은 과감하게 인생의 휴지를 두는 것은 괜찮은 방법이라고 보증하고 싶네요.
100인의 갭이어 추천 및 제보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마케팅 담당자 조해인(dorothy224@koreagapyear.com)에게 메일 보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