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th Gapper 이찬주
11개월의 갭이어
'막노동'에서 피어난 예술
# 학교생활과 끝나지 않는 아르바이트
1학년 때는 부모님이 등록금을 내주셨지만 쌍둥이 동생 둘이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용돈과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야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한 달에 버는 돈은 80만원 내외. 월세와 학자금 대출 상환금, 각종 생활비를 지출하고 나면 통장잔고는 언제나 늘 아슬아슬 했죠.
이렇게 대학에 와서 군 제대 후 학교생활과 생활비를 벌기 위한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지치게 되었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들 속에서 계속 힘든 시간들만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군 제대 후 휴학, 3학년 다니고 휴학, 4학년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보류하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재료비와 작업실 월세, 학자금대출을 비롯한 기타 생활비 등을 벌기 위해서는 꼭 일을 해야만 했고,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과 후배인 동생과 친구 몇 명이 어느 건물의 지하실을 빌려 자취방 겸 작업실을 만들기까지 머물 곳이 없어 선배 작업실이나 학교 실기실을 달랑 짐가방 하나만 들고 전전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돈이 없으니깐 어디를 가도 눈치보고 떳떳할 수가 없구나. 돈이 있어야 하는구나. 돈을 벌어야 미술도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제 주변에 이와 같은 상황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못 버티고 미술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무작정 학업을 중단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막노동, 그리고 이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시선
휴학 하고 선배, 친구들과 함께 수도권, 지방을 다니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작가 어시스던트, 인테리어 시공, 조형물이나 나무 놀이터 제작/시공, 방송 영화 소품 제작, 가구 제작 등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약간의 기술이 생겼고, 재료와 공구만 있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흉내를 내겠더라고요. 물론 일 할 때는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배운 것도 많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그 동안 배운 기술들을 바탕으로 전공과 관련된 일을 위주로 공구를 다루고 뭔가 만드는 일도 했지만, 몸 쓰는 노동 일을 주로 했습니다. 정적으로 앉아서 문서나 컴퓨터와 씨름하는 건 제 적성에 맞지도 않고 따분하다고 느껴져서요. 그리고 ‘막노동’의 경우는 주말에도 일할 수 있고 시급도 다른 일에 비해 쎈 편이라 망설이지 않고 시작하게 되었죠.
새벽 4시 모란시장 인근의 인력사무소도 나가본 적이 있는데 저보다 훨씬 일찍 오신 아저씨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알바지만 그 분들은 이 일이 생업이었기 때문에 제가 초보이고 학생이라고 뒤로 자꾸 밀려나고 그 날 하루 허탕을 쳐도 화나지가 않았어요. 그렇게 어딘지도 모르는 공사현장에 봉고차를 타고 가서 아파트를 짓기도 하고 빌딩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란역에서 작업복 입고 작업화를 신고 퇴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주변 사람들이 저를 엄청 불편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피하시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게 더럽지는 않았는데 ‘배운 것도 없고 게으르니 저런 막노동이나 하는 거지’라고 경멸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가다 하는 아저씨들은 엄청 부지런하세요. 사무소 문이 새벽 4시에 여는데 그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시고 자기가 하는 일에 신념과 자부심도 강하고요. 외국에서는 오히려 이런 분들을 인정하고 대우해주는데 우리사회는 무시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기도 했어요.
“아무리 기름 때 묻은 작음 부품이라도, 이 부품 하나가 없으면 기계 전체가 돌지 않는 건데 말이죠”
# 내가 원하는 만큼 돈을 벌고 모으려면, 그 끝은 어디일까
그러던 중 같이 작업실 생활을 하던 형이 몇 년의 준비를 거쳐 시장에 떡집을 개업했습니다. 같이 돈 벌어서 미술하자고, 그만 배고프자고 해서 떡집 개업부터 함께 일을 했습니다. 반 년 정도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심신이 지치고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무슨 일을 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돈을 벌고 모으려면 끝도 없을 것만 같았고, 그러면 미술은 영영 멀어지겠구나. 이러다가 결혼하고 아이 생기면 내 꿈도 멀어지겠구나. 그러면 내가 정말 행복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이라는 때는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이고 기약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후배로 있는 친동생도, 주변 동료들도 똑같이 이야기 해줬고요. 그렇게 고민 끝에 다시 미술을 하기로 용기를 내서 대학원에 와서 다시 조소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에 와서도 전부터 일하던 중고가전, 가구 가게에서 판매, 배송 알바를 잠깐 했던 적이 있습니다. 건물에서 냉장고랑 세탁기를 매입해서 들고나오는데 건물 관리인이 나와서 시끄럽다고 바닥 긁힌다고 그렇게 타박을 주더니 마지막에는 "못 배워먹었으니 저런 일이나 하지" 라고 하시더라구요. 또 다시 이런 일을 한다고 경멸하는 듯한 그 말투에 저는 "그래요, 못 배워먹어서 4년제 나오고 대학원 다니면서 생활비 벌려고 이러고 있네요, 그러는 아저씨는 어느 대학교 대학원 나오셨어요” 라고 하니 "시벌 재수없네" 하면서 들어가시더라구요. 몸 쓰는 일을 한다고 무시받는 일이 많아 지면서 사람들이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막노동에서 배운 노가다 기술, 예술로 재탄생하다
<옥탑 500에 30_시멘트, 혼합재료>
그래서 공사장에 버려진 폐자재들로 막노동 아저씨들이 하는 것처럼 구조물을 만들었어요. 합판과 철근으로 골조를 세우고 시멘트로 ‘공구리’를 쳤습니다.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합판과 각목, 철근 등을 가져다 ‘공사장’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옥탑 500에 30>이 있는데, 이 작품은 보증금 300에 월세 30을 연상하며 만든 작품이에요. 누가 봐도 싸구려 옥탑방, 내가 진짜 이렇게 살다가 내 집을 가질 수 있을까? 내 차를 가질 수 있을까?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연애, 취직, 차, 결혼 등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저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했고, 지난 10월에는 청소년과 청춘들을 위한 ‘청춘, 밤에 뜨는 열기구전’이라는 전시회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빌딩 1000에 100_시멘트, 혼합재료>
그리고 이렇게 만든 ‘공사장’시리즈는 인력사무소가 모여있는 그 곳에서 노상 전시회를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인력사무소에 나왔다가 허탕 치고 집에 갈 때는 알바인 저도 엄청 허무했는데 아저씨들 마음을 어떨까 싶어요. 그래서 현장에 못간 아저씨들에게도 그 길 위에서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아저씨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공구리는 이렇게 치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엉터리로 지었어? 내가 해도 이것보다는 훨씬 더 잘하겠구만.”
이 때 저는 아저씨들에게 이렇게 말해드리고 싶어요.
“그쵸? 아저씨들한테 배운 노가다 기술로 이렇게 엉터리 작품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예술이래요. 아저씨들이 짓는 건물이 사람들이 칭찬하는 예술작품이니 아저씨들이 하는 일도 그 누구 못지 않게 멋진 예술가의 일이에요”
<우리의 집은 없다_시멘트, 혼합재료>
# 남들과는 다른 갭이어, 그렇기에 내가 배운 더 특별한 경험
남들과는 다른 저만의 '막노동'이라는 시간을 통해 작품 제작에 소재가 되는 경험을 얻었고, 아무데서나 배울 수 없는 기술들을 얻었습니다. 건설현장이나 가구를 만드는 곳에서 배운 재료, 기술들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거든요. 그래서 친구들과 작업실을 꾸리고 만들 때 가벽, 시멘트 공사, 수도, 전기 등은 다 셀프로 시공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뻔한 모범답안 같지만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시는 분들을 보며 나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정말로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많잖아요. 그것들을 배웠어요. 머리로만 알던 것들이요. 아무리 글과 말로 들어도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보단 못하잖아요.
그리고 작업을 중단하고 이런저런 경험들을 통해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가야 할 방향을 다시 정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와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적으로 좋은 일들도 생겼고요. 여전히 주머니 사정은 어렵고 힘들지만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에 즐겁고 행복합니다. 저만 가진 경험과 느낌에서 나온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 갭이어를 갖고자 하는 청춘들에게, '질러!'
과 후배들이 비슷한 질문을 하면 항상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어설프게 계획하면 시간 낭비 밖에 안돼. 잘 계획해.’ 그런데 요즘은 바뀌었습니다. ‘질러. 당장 망쳤다고 생각해도, 해보고 후회하는 것과 안 해보고 미련만 갖고 사는 건 달라. 그렇지만 너의 인생이니깐 선택도 책임도 니 몫이야. 이후에 그 시간들이 어떻게 느껴질지는 너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 그 이후도.’ 아직까지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100인의 갭이어 추천 및 제보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마케팅 담당자 최다영(choi@koreagapyear.com)에게 메일 보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