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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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 몰라, 까짓 것 해보지 뭐’ 하고 세상을 좀 더 심플하게 바라보는 용기를 갖게 됐습니다. 또한 뭔가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인도에선 더 힘든 것도 했는데 까짓 것 이거 못하겠어?’ 라며 스스로를 응원하게 됐고,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마다 ‘됐어. 이 힘든 것도 한 순간이야.’ 라며 주저 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됐지요.
-인도에서 되찾은 작가의 꿈/서현지 갭이어족 갭퍼/총 6개월간의 갭이어 |
57th 갭이어족 Gapper 서현지
갭이어 기간 : 2009년 12월 ~ 2010년 1월 (2개월) 2015년 12월 ~ 2016년 3월 (4개월)
인도 내 23개 도시 여행 갭이어
현재 대한민국은,
한 해 중고등학생 학업 중단 6만 명, 꿈이 없어 그냥 노는 20대 34만 6천명, 취업 후 1년 내 이직율 40%대 돌입, 대학생의 75%는 대학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장인의 80% 이상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라고 말하지만 현실적인 방법과 도움이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한민국에도 '갭이어'를 들여오고자 합니다.
'갭이어(Gapyear)'란 학업과 일을 병행하거나 잠시 멈추고 봉사, 여행, 인턴, 교육, 창업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으로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 권장 되고 있는 문화입니다.
# 스물셋, 첫 번째 갭이어
저는 살면서 두 번의 갭이어를 가졌습니다. 한번은 스물셋 겨울, 그리고 또 한번은 스물 아홉의 겨울이었죠. 7년전, 인생의 첫 해외여행지로 굳이 인도를 선택했던 건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에게는 당장 떠나는 ‘장소’보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거든요.
‘학점, 등록금, 아르바이트의 굴레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주 잠시만 살다 오고 싶다’, ‘지긋지긋한 이 일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보고 싶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시에 학교에서 교양강좌로 수강하던 ‘인도미술의 미술의 이해’ 수업을 듣다가 문득 새하얀 뚜껑의 타지마할을 본 순간, ‘그래, 저기로 가자’ 결정지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떠나본 해외여행. 정말이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학교에, 아르바이트에 숨가쁘게만 살았었는데, 인생 처음으로 용돈 걱정, 부모님 눈치 없이 오로지 ‘나’ 하나만을 생각하면 됐던 그 시간들이 저는 정말 정말 소중했어요.
일상을 괴롭히던 그 모든 것들이 눈 앞에서 사라지니 온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라구요. 다이어리엔 ‘3시 시험,’ ,’7시 알바 면접’ 등이 아닌 ‘숙소 앞 팔찌가게 구경’, ‘땅콩 커리 맛있음’ 등의 새로운 일상들이 속속들이 채워졌고 그렇게 아기자기한 하루하루를 보낸 후, 저는 온 마음을 추억으로 가득 채운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었지요.
인생의 첫 쉼표를 찍고 인도를 떠나던 그날, 저는 생각했어요. ‘언젠가 내가 삶에 지쳐 모든걸 내려놓고 싶을 때. 그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 내가 언제 다시 인도 땅을 밟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행복으로 충만했으면 좋겠다’ 라고요.
# 서른, 다시 떠나다
저는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작문활동을 왔고, 대학교 역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제가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세상은 제 뜻대로 되질 않더라구요.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실패를 했고, 그렇게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첫 출근 하던 날, 늦은 만큼 더 최선을 다해 멋진 직장인이 되어보겠다 그렇게 다짐했지요.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그 열정을 따라주지 못하더라구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2시나 되어야 비로소 끝나는 업무. 그마저도 야근수당조차 받지 못하고 새벽까지 일해야 할 때도 부지기수라 결국엔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야 말았습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독한 커피를 들이켜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순간적으로 앞이 안보이기도 하고, 편두통과 위염을 달고 사느라 몸이 파스락 파스락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죠.
몸이 지치니까 마음도 함께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학생 때의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어느새 한껏 움츠러든 쭈구리 서현지만 남아있더라구요. 체력은 떨어져가고, 마음도 시들시들해져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로 향하던 출근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커리어. 적금통장. 발전된 업무능력… 하지만 그것들이 과연 지금 나의 건강과 정신을 해쳐가면서까지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까를 생각하니 ‘NO’라는 판단이 들더라구요.
단순히 ‘아, 일하러 가기 싫다’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라는 확신이 서고부터는 조금 더 냉정하게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글쓰는 삶을 살고 싶어했던 나.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직장인이 되고부터 글이라곤 클라이언트한테 보내는 메일과 보고서가 전부인 나날들. 퇴근하면 피곤에 쩔어 일기 한 줄도 제대로 못쓰고 잠들기 바빴던 그 하루하루.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당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당장 ‘내일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그 안일함을, 이제는 조금 바꾸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저는 7년 만에, 한번 더 쉬어가기로 결정 했습니다. 지금까지 ‘직장인 서현지’로 나의 20대 후반을 꽉꽉 채웠으니, 이제쯤은 스스로를 위해 한 템포 쉬어가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입사와 함께 허공으로 날려버렸던 작가로서의 꿈도 다시 되찾아오고,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신감도 회복해야겠다고.
저는 서른을 목전에 앞둔 어느 날, 미련 없이 사표를 제출하곤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내 인생 첫 해외여행지였던 그곳. 내 젊은 날의 열정과 패기를 모두 묻어두었던 바로 그 땅. 인도로 말이죠.
# 제 인생의 첫 쉼표를 찍는데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물셋, 대학생 때 훌쩍 해외여행을 갈 수 있었던 건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큰 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수필, 시, 슬로건 등 각종 공모전에 닥치는 대로 도전을 했었어요. 시급 3500원도 안 되는 알바로 용돈을 벌고 있던 그 당시, 제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곤 공모전에 당선되는 것 외에는 없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운 좋게도 모 기업에서 시행한 인재채용 공모전에서 1위에 당선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상금으로 100만원이란 큰 돈을 받게 되어 정말 기뻐했죠. 그리고 좋은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 몇 개월 뒤에는 한글문화연대 공모전에서도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갑자기 연달아 들어온 행운에 몸둘 바를 몰랐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돈을 제 인생의 첫 쉼표를 찍는데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내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해외여행 가보겠나.’ 하는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는 각오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었답니다. 이렇게 제 첫 여행경비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으로 해결이 되었지요.
두 번째 인도여행을 계획할 때는 이미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비용을 마련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리고 인도가 워낙 물가가 저렴한 곳이라 막상 여행지에서의 생활비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막상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따로 있었어요. 지금 인도여행을 가고자 하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말씀 드리자면, 우선 인도는 비자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요. 그리고 지방에 거주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인도대사관까지 왕복하는 교통비도 따로 들게 되죠. 그래서 저는 6개월짜리 멀티플 비자비 약 9만원, 그리고 왕복 교통비 8만원을 비자를 받는데 사용했답니다.
인도는 모기로 인한 각종 풍토병이나 광견병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사전에 예방주사를 맞거나 약을 처방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답니다. 장티푸스, 콜레라, 말라리아 등이 바로 그것들이죠. 저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가 뎅기열에 걸려 아주 큰일날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인도여행 때는 여행자 보험, 약 처방 등 준비를 꼼꼼히 한 편이예요.
이것 외에도 배낭 및 침낭을 새로 구비하고, 안전을 위해 호신 스프레이와 호루라기 등을 구입하는 등 출국 이전에 생각보다 많은 금액을 사용했답니다. 준비비용이 거의 비행기 값 만큼 나왔으니 꽤 많은 지출이 있었던 편이예요.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치가 않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웬만한 건 다 챙기려고 노력했죠.
# 꿈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아까워말자
갭이어를 떠나면서 제일 걱정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재취직과 커리어 문제였죠. 그래서 퇴사를 하고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선뜻 응원해주지는 않았답니다. 마냥 젊기만 한 나이가 아닌데다 요즘 워낙 재취업하기가 힘드니 다들 걱정을 하신거죠.
“꼭 퇴사까지 해야 해? 다녀와서는 뭐 할 건데?”
“너 곧 서른이야. 정신차려”
물론, 저도 모르지는 않았어요.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수 있을 만큼의 금수저도 아니고, 의사나 변호사처럼 언제든 다시 취업할 수 있는 전문직도 아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무래도 없을 순 없었답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꼭 한번쯤은 ‘하고 싶은 일’을 저의 직업으로 삼아보고 싶었어요. 학창시절부터 꿈꾸어왔던 작가의 길. 스펙 쌓고 취업해서 돈 버느라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그 꿈을 이번에야 말로 한번 이루어보자고.
당장 많이 벌지 않아도 좋으니까, 돈이 없어서 한동안 칩거생활을 해도 괜찮으니, 재취업에 목메지 말고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보자고. ‘그래, 내 긴 인생에 까짓 1~2년. 글 쓰는데 한번 투자 해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불안한 마음이 점차 사라지더라구요. 그렇게 저는 ‘꿈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아까워말자!’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 두 번째 인도여행은 제 스스로가 여행의 주인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완성되어 갔습니다.
‘쉬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지만 또 막상 도착하고 보니 이것저것 볼거리들에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저건 봐야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사먹어 봐야지.’ 하며 여행 초반엔 엄청 여기저기를 쏘다녔던 것 같아요. 엄청 피곤했지만, 그래도 남들 간다는 데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아도 꾸역꾸역 돌아다녔답니다.
그러다가 함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한국인 여성 두 분을 만났어요. 두 사람은 한국에서부터 함께 출발해 세계를 여행한지 그날로서 60일째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분들과는 처음 만날 때부터 마음이 참 잘 맞아 새벽까지 숙소 옥상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놀았었는데 그때 두 분이 이런 대화를 나누더라구요.
“야, 근데 우리 내일 뭐하지?”
“내일? 글쎄 뭐할까? 옆에 사원이나 보러 갈래?”
“아니, 별로 안 땡기는데.”
“하긴, 나도 뭐 엄청 궁금하진 않아.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
“good! 아무것도 하지 말자.”
저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했습니다. 분명 쉬고 싶어서 떠난 여행인데,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왜 남들이 한다는 이유로 내키지도 않는 관광을 억지로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원했던 여행은 이런 게 아닌데.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저는 Travel이 아닌 Tour를 하고 있었던 제 자신을 발견한 이후, 그 때부터는 ‘남들이 하니까’가 아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간 해왔던 맛집 투어와 유적지 관광을 멈추고 ‘호숫가에서 멍 때리기’, ‘숙소 옥상에서 해 질 때까지 앉아있기’ 등으로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죠.
제 서른의 진정한 ‘갭이어’는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으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고, 그제서야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거든요. 남 눈치 봐가며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이미 회사 다닐 때만으로 충분하니까. 이제부터 내 여행은 내가 만들기로 했던 거예요.
이렇게 저의 두 번째 인도여행은 제 스스로가 여행의 주인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완성되어 갔습니다. 쉬고 싶을 때는 쉬고, 놀고 싶을 때는 아주 원 없이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말이죠.
# 그 사람이 저를 기억을 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그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참 감사했어요.
(23살)
(30살)
여행하는 내내 행복했던 순간들이 참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지금 기억에 나는 건 스물 세 살에 만났던 게스트 하우스 주인 아저씨를 서른에 다시 마주했던 순간이었어요. 어릴 적, 사기를 당해 울고 있던 나를 다시 일으켜세워 주고, 힘내서 또 다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준 정말 소중한 사람이죠.
인도 여행을 다시 가겠다 마음을 먹었을 때, 저는 서점으로 달려가 가이드북 바라나시 편을 가장 먼저 펼쳤답니다. ‘혹시나 그 게스트 하우스가 없어졌으면 어쩌지.. 그럼 두 번 다시 그 아저씨를 볼 수 없는데’ 하며 불안해했어요.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그 게스트 하우스는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굳건했고, 그렇게 저는 서른을 앞둔 어느 겨울, 내 소중한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답니다.
그 사람이 저를 기억했냐구요? 아뇨, 당연히 못하죠 ^^ 정말 인기가 많은 숙소라 하루에도 수십 명의 손님들이 오가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이 저를 기억을 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그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참 감사했어요.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까봐, 나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앞으로 영영 마주하지 못하게 될 까봐 무척 두려웠는데, 그 아저씨를 다시 마주한 순간 마치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들이킨 것 처럼 마음이 편안해졌었답니다.
영어가 짧아 고작 ‘see you again!’ 밖에 못했던 지난날에 비해, 서른에는 조금은 더 길게 그 분과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추억 위에 아주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더 얹을 수 있었답니다. 다시 헤어지는 날 제가 아저씨한테 그랬어요. 언젠가 다시 꼭 이곳을 찾을 테니, 망하지 말고 오래오래 해먹으라고.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폰디체리에서 응급실에 실려갔던 일이예요. 인도여행을 시작하고 한 달 반쯤 되었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배가 너무너무 아픈거예요. 처음에는 단순한 배탈인줄 알고 한국에서 가져간 지사제를 먹으며 버텼는데 이게 저녁이 지나니까 고열과 함께 구역질까지 더해지면서 겉잡을 수 없이 통증이 심해졌어요.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걱정을 하며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병원 응급실이었어요.
병세가 악화되자 당시에 함께 있던 동행이 저를 응급실로 데리고 왔고, 그렇게 새벽 내내 모기에 뜯겨가며 제 곁을 지켜주었다고 해요. 검사 결과, 제 병명은 식중독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전날 먹었던 소고기 스테이크가 말썽을 부렸던 거죠.
당시 동행은 정신을 잃은 저를 대신해 전자사전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합니다. 수줍음이 많아 영어로 짤막하게 인사하는 것 조차 부끄러워하던 그 동생이, 새벽 내내 의료진들과 고군분투 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울컥 올라오더라구요.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겉잡을 수 없는 죄책감도 함께 생겨났습니다. 나에게 이 여행이 소중한 만큼, 이 사람 역시 하루하루가 아쉬울 텐데 그 금쪽 같은 시간을 나 때문에 이틀이나 허비하게 했다는 생각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몸이 아파서 힘든 것 보다, 내가 이 사람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너무 무겁고, 또 미안했어요.
이 응급실에서의 하루 이후, 저는 여행 내내 건강관리에 특히 힘을 쏟았답니다. 앞으로 어떤 동행을 만나든, 도움은 못 될지언정 짐 만큼은 되지 말자. 그리 다짐했기 때문이지요. 몸도 고생하고, 마음은 더더욱 힘들었던 폰디체리에서의 이 밤을, 저는 앞으로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아요.
# 여행 후에 달라지는 건 나를 둘러싼 '상황'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많은 분들이 이 질문을 하시더라구요.
“다녀오니 뭐가 좀 달라져? 세상이 막 새롭게 보이고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YES! 랍니다.
사실 저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걱정부터 하는 편이었어요. ‘막상 해봤는데 별로면 어떡하지?’, ‘실패하면 부끄럽겠지?’ 등등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지레 짐작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죠.
하지만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 몰라, 까짓 것 해보지 뭐’ 하고 세상을 좀 더 심플하게 바라보는 용기를 갖게 됐습니다. 또한 뭔가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인도에선 더 힘든 것도 했는데 까짓 것 이거 못하겠어?’ 라며 스스로를 응원하게 됐고,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마다 ‘됐어. 이 힘든 것도 한 순간이야.’ 라며 주저 없이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됐지요.
물론, 여행을 가든 안 가든 우리의 상황 자체는 크게 바뀌지가 않습니다. 학생 분들은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여전히 학생일 테고, 직장인들 역시 여행이 끝나고 나면 또 다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될 거예요.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갭퍼 분들이 그러했듯이, 무언가를 경험해보고 난다면 확실히 오늘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답니다. 결국, 여행 후에 달라지는 건 나를 둘러싼 ‘상황’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 이런 게 바로 행복인건가, 싶습니다.
갭이어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지 3개월. 저는 글 쓰는 삶을 살아보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토대로 여행에세이를 집필하고 있습니다. 7월부터는 소셜 펀딩을 시작할 예정이라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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