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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I 나를 찾아 나선 갭어이 (Gap Year) "난 뭘 할 때 행복하지?"
등록일
2017.06.12
조회수
67

 

 

 

요즘 1020세대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갭이어(Gap Year)’. 앞만 보고 달려 온 ‘정상 궤도’를 잠시 이탈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대부분 휴학을 단행해 멀리 해외여행을 가거나 국제 자원봉사 등의 다소 거창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곤 한다. 

하지만 그냥 방학 등을 이용해 주로 국내에서 평소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한 ‘일상의 갭이어’를 한 여대생이 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사연을 소개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갑자기 내가 정말 원하는 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문득 자신의 진로에 회의감이 든 이소희(24) 씨는 1년을 다른 방식으로 보내기로 한다. 그동안 항공승무원을 준비하며 착실히 학점도 따고 조주기능사 자격증에 아시안게임 봉사까지 치열한 활동을 해 왔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았다. 

심리 상담도 받아 봤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청년모험가의 강연회에 갔더니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난 어떻게 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씨는 주변에 우울증을 고백하고 쉰 명에게 설문조사까지 벌였다. ‘난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다녔던 것이다.

 

‘나’라는 친구와 동행을

 


 

진정한 나를 찾는 길, 그렇게 이소희의 남다른 1년, 갭이어가 시작됐다. 그녀가 선택한 건 그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리기를 좋아해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붓을 잡곤 했지만 정식으로 배워 본 적은 없다. 

“승무원은 어떡하고? 곧 졸업인데…. 미술 전공자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그림을….” 몸 약한 어머니와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바로 독립을 해야 되는 시기다. 애초에 그녀의 갭이어는 화려할 수 없었다. 한 학기 조기졸업하고 방학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 승무원이 아닌 그림에 매진한 것 정도다. 

하지만 그것조차 큰 ‘불효’라 느껴졌다. 아나운서가 된 언니와 함께 늘 부모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착한 딸이었으니까.
 
“뭐든 나 혼자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서울에 와서 하루도 쉬면 불안했어요.”
 
지인들은 이 씨가 자신한테 너무 엄격하다고 했다. 또 항상 밝고 쾌활해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바로 그 ‘착한 딸 콤플렉스’ 때문에 남들의 기대에만 부응해 오다 정작 자신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서 갭이어를 갖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딱 1년이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에게 온전히 할애할 수도 있는 시간이 아닐까.
 
“고등학생들을 보며 ‘나도 조금만 어리면 그림을 시작할 텐데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셨죠. 순간 번쩍 했어요.”

 


 

이 씨는 재작년 12월 무작정 제주도로 떠났다. A4 크기의 드로잉북과 붓펜, 물감이 전부였다. 칼바람을 맞으며 스케치에 몰입하는 자신에 묘한 흡족감이 들었고, 땅바닥에 앉아도 ‘난 거리의 화가야’ 싶으니 창피함도 잊었다. 

그 뒤로 경복궁을 직접 그린 엽서를 만나는 이마다 나눠 주는가 하면 태국에서 생활한복을 입고 K-팝을 추는 등 한 달에 한 번 하고 싶은 일을 속속 해치운다. 지금까지 88명의 외국인 등 370명에게 엽서를 전달하고 인증샷을 남겼다.
 
점점 대담해졌다. 고향 부산에 가서는 대뜸 ‘시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시청에 전화를 건다. 시장을 만나진 못했지만 부산시 공식 페이스북에 이 씨의 그림을 싣는 데 성공한다. 이기대와 청사포, 다대포 등 부산의 숨은 명소들이 그녀 특유의 캘리그라피와 수채 풍경화로 재현돼 15만 시민들을 만났다. 

제주도 그림은 지난해 4월 한국관광공사 페북(39만 팔로우)에 소개됐다. 이 모두가 지난달 이 씨의 블로그명 ‘그림그리는베짱이’의 첫 개인전을 여는 데 바탕이 된다. 전시회 비용은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 자신의 스토리를 카드뉴스로 올리고 마련했다. 소소하게 시작한 일들이 그림과 사람을 매개로 판이 커져 갔다.

 


 

태국에서 ‘그림이 맘에 든다’며 아트 뮤지엄을 하는 사람을 만나 쪽지까지 받아들었을 땐 정말이지 흥분이 몰려 왔다. 그러나 부족한 영어로 대화가 마무리되지 않았고 휘갈겨 쓴 영어 주소로 이메일이 닿지 않았다.

“기회가 오더라도 준비돼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죠.” 

준비를 하면 언젠가 또 기회가 오리라. ‘영어 겁쟁이’인 이 씨가 낯선 외국인에게 경복궁 엽서로 다가가지 않았다면 비록 날려 버린 이런 기회조차 오지 않았을 테니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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